아침마당 문주란 15세 동숙의 노래로 데뷔부터 현재까지 총정리해드릴게요.
아침마당에 출연한 문주란은 49년 부산 출생, 73세, 본명/ 문필연, 거주지/경기도 하남시, 데뷔/1966년 '동숙의 노래' 대한민국의 가수. 1966년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동숙의노래'라는 곡으로 파격적인 데뷔를 하였다.
여성스럽고 귀여운 인상과는 대비되는 굵고 깊은 저음이 그의 특색으로, '국내 최저음 여가수','어른 목소리 내는 아이'등으로 화제를 모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데뷔해 큰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데뷔하고 몇 년 지난 1969년, 실연을 이유로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엄청난 스캔들이었는데 상대 람성이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에 곧장 활동을 회복했지만, 이어 1972년 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1973년에는 이전의 자살 소동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남성의 부인이 사주한 일당에게 어린 조카(당시 7세)와 함께 납치당해 마구 폭행 당한, 이른바 '문주란 납치사건'이 발생하여 세간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어 1975년에는 또 해당 남성과 얽힌 사생활 문제, 그리고 계약 파기 문제로 인하여 이번에는 아예 협회로부터 6개월간 방송 정지를 당하였다.
이 연애의 실패 이후 아예 자신은 남성에 대한 끌림이나 애틋한 사랑 같은 게 없어져버렸다면 40년 넘게 독신을 고수하는 중이다.
이어 1986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차츰 활동이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다 1990년에 트로트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로 재기에 성공해,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가요계에서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한 여자로서의 일생은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13일 방송된 KBS1 '아침마당'은 '화요초대석' 코너로 꾸며져 가수 문주란이 게스트로 출연해, 어린 나이에 데뷔를 했던 배경에 대해 밝혔습니다.
이날 문주란은 매력적인 중저음을 뽐냈습니다. 그는 "학교 때부터 노래를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또 목소리가 낮아 합창단에서는 베이스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문주란은 데뷔 일화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15살의 나이에 데뷔를 했다고 밝힌 문주한은 "나이가 어려 활동에 지장이 많았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제가 데뷔를 한 건 운"이라며 "제가 13살에 MBC 노래 관련 프로그램에 나가 우승을 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 왕중왕전에 나가지 못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부른 게 가요계에 소문이 났다. 이후 서울에 올라오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MC 김재원 아나운서는 "문주란 씨를 '아침마당'에 섭외하기까지 어려웠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에 대해 문주란은 몇 차례 '아침마당' 섭외를 거절해온 사실을 밝히며 "특별히 할 얘기가 없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어 "가족이 많이 있어서 본인 외 가족들 자랑도 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지 않냐"라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또한 문주란은 "몇 번씩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나가는 대신 분량을 짧게 해달라고 했다"며 "제거 TV활동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간에 힘을 좀 드리고 싶고, 신곡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문주란은 과거 방송에 출연해, 자신을 둘러싼 가장 황당한 루머로 백일섭과의 동거설을 꼽았습니다. 문주란은 "예전엔 가요책들이 많이 있었다.
기자와 친하니까 집에서 술 먹고 노는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더라. 백일섭씨가 도와주는 모습을 요구해 촬영했는데 장난스럽게 동거생활이라고 제목이 나갔다"고 밝히며 황당한 루머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동숙의 노래는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노래로 문주란이 1965년 발표한 데뷔 앨범 <문주란 히트송 제1집>에 수록한 곡으로 크게 히트해 TBC 신인상, 공보부상 제정 제1회 무궁화상 장려상 등을 수상했다. 임원직 감독의 영화 <최후전선 백팔십리>에 주제가로 사용되었고 영화의 O.S.T는 이듬해 발매되었다.
문주란은 어린 시절 부산에서 운수회사를 경영하시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음악을 사랑하셔서 집에 많은 음반을 소장하고 계셨고 문주란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여타의 아이들과 달리 음색이 굵고 짙어 목소리가 동요보다는 가요에 어울렸다.
하지만 중 1때 아버지가 운영하던 운수회사가 부도를 맞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문주란은 집보다는 밖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만나 빠져든 유랑극단은 가출의 경험까지 안긴다. 동요보다는 가요를 많이 부르며 자랐던 감성이 유랑극단과 맞은 것이다. 문주란은 그 어느 곳보다도 유랑극단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곳을 쫓아다니며 잠시 가수로도 생활을 했다.
이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한 친구는 부산 MBC 노래 경연대회 <톱 싱거>에 출전 신청을 한다. 그리고 서바이벌 경연이었던 이 대회에서 문주란은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을 불러 6주간 1위를 차지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산에서 열린 경연대회에 여러 번 참가해 모두 입상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유랑극단을 통해 문주란의 소문은 서울로 전해졌고 당시 그녀의 존재를 알았던 지인들을 통해 서울로 스카우트 된다. 그리고 서울의 극장 쇼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 문주란의 주된 레퍼토리는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였다.
성재희보다 더 깊은 맛을 내는 문주란의 보컬에 감탄한 김인배, 손석우 등의 작곡가들은 문주란을 위해 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사가 전우는 그때까지 문필련이란 이름을 사용했던 그녀의 이름을 꽃이름같다며 문주란으로 바꿔주었다. 하지만 첫 앨범은 백영호와 함께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시공관에서 보슬비 오는 거리를 부르는 문주란의 모습에 월간지의 시상식장에 나와 있던 백영호가 단 번에 사로잡힌 것이다. 당시 백영호는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미자의 후속타를 고민하고 있던 백영호는 지구 레코드 사장에게 문주란을 이미자 이후 최고의 가수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고 계약까지 맺게 만들었다.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인디 레이블에서 메이저사 기획사로 가수를 뺏어간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발표하게 된 동숙의 노래는 음반 발매 전부터 화제가 되어 각종 매스컴을 장식했다. 요즘 YG나 SM에서 가수가 새 앨범을 낼 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문주란의 목소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너무 너무 희귀했다. 모든 매스컴들은 “어른의 목소리를 내는 아이”로 그녀를 소개했고 전국에 회자되었다.
이런 화제에 힘입어 동숙의 노래는 이미자의 잊을 수 없는 연인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하며 그녀를 스타덤으로 인도한다. 현재까지도 동숙의 노래는 당시의 히트 곡들 중 살아남은 몇 곡에 포함되어 있다.
동숙의 노래는 1966년 개봉된 임원직 감독의 영화 <최후전선 백팔십리>에서 태현실이 맡았던 여주인공 동숙의 테마로 사용되었다. 영화는 전쟁영화로 이 곡은 남주인공이 여주인공과의 사소한 오해로 인해 서로의 생각을 좁히지 못하고 입대해 동숙의 이름을 부르며 장렬히 전사한다는 이야기다.
가사는 한산도가 한 여인의 사연을 듣고 만들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사연이란 공장에서 일을 하며 고향의 부모형제를 뒷바라지하던 오동숙이란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의 삶에 관한 것이다. 뼈 빠지게 가족을 부양하며 일만하던 동숙은 서른 즈음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게 되고 거기서 한 선생님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남자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던 동숙은 그 선생이 어머니의 간병을 고민하자 모은 돈을 모두 줘버린다. 하지만 후에 공장이 문을 닫고 아버지의 수술 문제 등으로 선생을 찾아갔더니 그 선생은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마치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갖고 논 것을 알게 되었다. 분노한 동숙은 선생을 칼로 찌르고 살인미수로 구속된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MBC의 <타임머신>, KBS <스펀지>,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tvN <강용석의 고소한 19> 등에 소개되며 실화인 것처럼 알려졌다. 하지만 문주란은 OBS <나는 전설이다>에 나와 사실과 다른 설일 뿐이며 영화 <최후전선 백팔십리>의 주인공 동숙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에 대한 진실은 작사, 작곡가 모두 돌아가셔서 알 길이 없고 다만 최초 매스컴에 노출된 경로를 세밀하게 추적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78년 한산도는 백영호를 고소했다. 둘은 여러 작품을 같이 했는데, 한산도는 작품을 팔 때마다 30%를 받기로 했지만 백영호가 자신의 도장을 몰래 파 작품을 팔고 돈을 갈취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곡을 비롯해 동백 아가씨, 애수, 잘 있거라 고모령 등 작사가로 이름을 올린 110여곡의 작곡가도 사실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백영호도 맞고소했지만 저작권법 위반에 대해서는 한산도가 기소를 취하했고 백영호의 사문서 위조 등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90년엔 양영찬 작가에 의해 소설 <동숙의 노래>가 나왔다. 카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가수 문주란, 그녀는 왜 자신이 부른 히트곡의 소설화를 25년 만에 허락 했는가”이다.
가사는 1절은 위의 한 여인의 사연에 해당하는 것 같고 2절은 그 이후에 여인이 출소해서 상대와의 짧은 재회를 말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1절과 2절을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969년 유부남이었던 남성과의 실연을 이유로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남
1970년에 곧장 활동을 회복하였지만, 이어 1972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부상을 당함
1973년에는 이전의 자살 소동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남성의 부인과 그녀가 사주한 일당에게 어린 조카(당시 7세)와 함께 납치당해 폭행 당한,
이른바 '문주란 납치사건'이 발생함
1975년에는 또 해당 남성과 얽힌 사생활 문제, 그리고 계약 파기 문제로 인하여 연예 협회로부터 6개월간 방송 정지를 당함
이 연애의 실패 이후 아예 자신은 남성에 대한 끌림이나 애틋한 사랑 같은 게 없어져버렸다며 40년 넘게 독신을 고수하는 중. 1986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차츰 활동이 주춤하게 됨
1990년에 트로트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로 재기에 성공해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음
문주란은 1965년 중학교 3학년 때 부산MBC 노래 경연대회에서 ‘보고 싶은 얼굴’로 1등을 수상.
이듬해 고등학교 1학년에 ‘동숙의 노래’로 데뷔해 처음에는 중성적인 초저음 목소리 때문에 남자 가수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후 ‘어른 목소리 내는 소녀’, ‘국내 최저음 여가수’ 등으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고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가창력과 독특한 목소리로 청중들의 마음을 서서히 사로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후 대중가요의 ‘거목’ 작곡가 박춘석과 인연이 닿아 이미자, 남진, 하춘화 등 명가수들이 속한 일명 ‘박춘석 사단’의 막내가 됐고, 문주란은 제2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박춘석 작곡가가 만든 음악에 목소리를 입히며, ‘톱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문주란은 스캔들에 시달리게 되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기도 했다고. 결국 스승 박춘석은 그녀를 ‘정신병동’에 가두는 결단으로 그녀를 지켰다고 하는데요. 정신을 차린 문주란은 스승에게 "두 번 다신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병동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납치사건 등 파란만장한 사건, 사고에 휘말린 문주란은 방송계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고 가끔 방송에 얼굴을 비췄지만 많은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문주란의 평범한 일상이 공개. 문주란은 430평의 화려한 전원주택에 살던 지난날과 달리, 아담한 아파트에 반려견과 둘이 살고 있다는데요
외로운 선배를 위해 후배 가수 조항조가 특별한 만남을 마련합니다
"더는 내 생애 남자는 없다!" 외쳤던 문주란이 의문의 남성과 핑크빛 기류에 탄 사연이 공개.
또한 ‘진짜 진짜 좋아해’, ‘당신은 모르실 거야’, ‘열정’ 등 히트곡을 가진 가수 혜은이와도 만납니다
문주란은 1960년대, 혜은이는 1970년대, 두 가수는 10대에 데뷔해 톱 가수 자리에 올랐는데요~
서로의 첫인상을 기억하고 있는 두 사람은 문필연(문주란의 본명), 김승주(혜은이의 본명) 시절을 추억하며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웁니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에 혼자가 편해진 삶, 노래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다고 말하는 문주란. 더 나이 들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날이 오기 전에 더 많이 노래하고 싶다고 하네요.
댓글